고교인생

고교인생

 나의 고교인생이 어느정도 끝났다. 나는 패배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을 매듭지어갈 뿐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신만이 알리라. 그런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는 불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여주었고 어떤 결과에도 불평할 수 없다. 설령 3년 전과 같이 요행으로, 승리의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에게 패배한 것은 차이가 없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완패다. 그 결과의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이제와서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그 정도의 그릇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3년동안 진화했다. 천천히. 사회에 적합한 일꾼으로.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패인은 다음과 같다.

 1. 게으른 것
 2. 밀지 않은 것(자신의 게으름을)
 3. 늦은 것
 4. 미룬 것
 5.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자신은 고결하다고 생각한 것
 6. 너무 많이 후회한 것
 7. 너무 적게 반성한 것
 8. 가식과 위선

 아직도 나는 이러한 죄의 씨앗을 품고 있다.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언제일까.
 밀어야 한다. 순간순간 나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마치 팽이와 같아서 흔들릴 때 채찍으로 갈기지 않으면 곧 멈추어 버린다. 그러나 흔들리는 순간마다 적절히 쳐 주면 곧 마치 머리 위에 고요히 서 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팽이가 된다. 나는 나태가 덮쳐올 때마다 그 나태를 밀어 치우지 않았고 결국에는 몇번이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나의 수련은 점진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패배이다.
 오늘 조금 좋은 일이 있었다. 나는 순간 기뻐질려고 했으나 곧 스스로를 차게 식혔다. 기쁨은 슬픔의 씨앗이다. 새옹의 지혜를 상시에 기억하자. 나는 단지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며 밀어 나갈 뿐이다.

 

나는 잘 지내

 
 'How are you?'에 대한 답은 언제나, 'I'm fine, thank you.'가 되어야 한다. 상대는 나의 고민이나 아픔 같은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덧없는 애정호소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환부를 자극할 뿐이다. 그러나, 'I'm fine'은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굳건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진솔한 평상심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불행하다. 이것은 유아의 사고방식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성장한다는 것은 아픔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닌, 아픔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잘 지낸다.'

by 짙푸른 | 2008/07/01 18:21 | 트랙백 | 덧글(0)

운다는 것

 아아... 울고 싶다. 정말로 누구든지 상관없으니 위로받고 싶다. 밀밭의 허수아비처럼 지지대 없이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울어선 안 된다. 이것은 더러운 눈물이다. 마치 아이의 울음처럼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투정부리는 눈물이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느낄 때 종종 혼자서 울어 보았다. 남는 건 허무였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은 울어선 안 된다. 운다는 것은 지고한 행위이다. 그것은 종착점이다. 지금은 그저 의미 없는 곡에 불과하다.
 나는 종종 상상한다. 성공을 거둔 한 남자. 자아를 실현하고 세계를 위해 몸을 내던지며 뜨거운 삶을 살아간 그. 그의 삶에는 온갖 극적이고 감동적인 궤적들이 새겨져 있다. 좌절과 환희와 두려움과 우정과 이별과 그 모든 것이... 그 날 밤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느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한다. 모든 것이 미음(微音)에 파묻혀져 있는 보랏빛 밤. 차창 밖으로 그는 흘러가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소리없이 차는 고속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집에 도착하자 두 천사같은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다. TV를 끄고 그는 지친 몸을 자리에 앉힌다. 아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늙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젊을 때와 다름없이 비치는 그의 반려자. 그를 이해하는 그의 영원한 동반자. 그가 사랑한 한 강인한 영혼. 둘이서 같이 간 길, 같이 겪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들... 아내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다. 남자는 짙은 미광이 은은히 감싸는 한밤중의 방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운다. 조용히... 지고하게... 몸을 비틀지도 않고, 크게 울부짖지도 않고, 다만 운다. 혼자서... 그것은 가장 고귀한 진주처럼 방울지는 눈물이다. 이유는 없다. 다만 운다. 마치 울면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울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겁하다. 민폐에 불과하다. 적어도 지금은.

by 짙푸른 | 2008/06/29 21:10 | 트랙백 | 덧글(0)

책을 선정하는 문제에 관하여



<ひとり上手> - 中島みゆき
 

 나는 어떤 주제에 몰입할 때마다 읽을 책을 선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예를들어 최근에는 춘추전국에 관한 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 전체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많아도 고대사만 특별히 다룬 책은 별로 없었다. 결국 나는 어떤 책을 읽을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고심해야했는데 모든 책이 (나의 현재의 관심사에 비추어 볼 때)각자만의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책은 집필연도가 너무 오래전이라서 안되고, 어느 책은 고대사에 할애하는 부분이 너무 적어서 안되고... 마치 편집증처럼 나는 나의 목적에 부합하는 한 권의 책을 찾아 헤맸다. 어느 때에는 나의 이러한 집착이 성공적이기도 하지만 어느 때에는 실패한다. 
 나의 이러한 집착에 나는 내가 품고 있는 미신 비슷한 지식관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된다. 내가 나의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는 책을 갈구하는 이유는 내가 마음 어딘가에서 그 책을 소유하는 것을 나의 지식이 구체화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앎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 실제적인 책이 되는 것이다. 내 두뇌는 마치 책을 담아두는 창고처럼 이미지화된다.
 이런 미신은 나의 다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벗어나야 한다. 작가들은 책을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내 목적에 부합하는 책이 언제나 존재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지식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단 한 권의 책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일수 밖에 없다. 좋고 나쁜 책의 가림은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지나친 편식은 독이 된다.

by 짙푸른 | 2008/06/28 18:02 | 트랙백 | 덧글(0)

치과

 1. 최근 치과에 다닌다. 죽을 맛이다. 치료과정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항상 치료대에 누울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나는 여기에 쉬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벌을 받고 있다. 양치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은 벌. 단 것을 과식한 벌. 의사의 말을 미리미리 듣지 않은 것. 그로 인해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있다. 시간 낭비. 신체의 고통. 무엇보다 돈. 아, 돈!
 나의 채찍질이 더 혹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편하게 앉아 금니를 끼우지만 그것은 몽땅 나의 부모에게 청구된다. 나의 바보같음으로 인해 이런 타격을 입히게 되다니. 눈물이라도 쏟고 싶다.
 아직 치료는 한참 남았다. 더욱 더 스스로를 비난하기를 원한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그러나 사실 나는 어젯밤 양치를 하지 않았다. 오, 주여... (웃으면 안 되는데...)
 2. 나는 애정결핍이다.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애정을 나누어주면 나는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또 두려워한다. 그것을 잃을까. 그래서 적절히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 때문에 또다른 결핍이 생긴다. 결국 나는 애정문제에 있어서 결핍과 집착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동년배의 여성을 친구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것은 욕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부적으로 금해버리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이 나온다. 친구라고 함은 가깝다는 것인데, 스스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이미 나에게 노나준 애정 한 조각에 나는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정으로서 받아들인다면 좋을텐데.
 누구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그러한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말은 쉽지. 나는 오늘도 새까맣고 끈적거리는 리비도의 바다에서 무기력하게 부유하고 있다.

by 짙푸른 | 2008/06/27 21:59 | 트랙백 | 덧글(4)

개미지옥

 내가 어렸을 때 개미지옥 아니면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있었다. 일종의 놀이인데 일단 세 명 정도가 모여야 가능하다. 몇 놈은 모래밭에 앉아서 고사래손으로 열심히 구덩이를 판다. 몇 놈은 식수대로 가서 열심히 물을 나른다. 모래에 흡수되기 때문에 빨리빨리 날라야 한다. 계속 반복하면 웅덩이가 형성된다. 묘미가 여기에 있는데 질퍽한 모래로 여러 지형을 만들 수 있다. 호수도 만들 수 있고 계곡도 만들 수 있고 미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개미 몇 마리를 빠트린다. 그럼 그 놈들이 열심히 발버둥치면서 헤엄(?)을 친다.
 딱히 개미를 괴롭히고자 하는 새디스트적인 욕망이 있는 건 아니고 단지 소세계를 창조하는 재미가 있었을 따름이다. 개미는 그 나라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거주민이었다. 육상세계가 수중세계로 전환하는 그 기묘함. 뭍과 물을 가른 우리는 완성된 세계에 감동해 탄식했다. '보기에 좋았노라.'
 생명경시풍조를 낳는 잔혹한 유희라고 생각될 여지도 있지만 일면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개미지옥 놀이는 근본적으로 창조의 놀이다. 남아의 놀이문화에는 창조성이 너무 부족하다. 싸우고 부수고 이기는 놀이는 많지만 정교하게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고 복잡한 것을 창조하는 섬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인형의 집을 남아들에게서 앗아간 부모들 탓이다. 어떻게 보면 인형의 집보다 배로 낫다. 인형의 집은 말하자면 레토르트, 아이들이 새로 개발할 여백을 남겨놓지 않은 기성제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훨씬 더 스릴있고 어려운 게임이다.
 놀이가 전래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 발상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근래에 똑같은 짓을 하는 아동들을 난 보았다. 비가 그친 후 아파트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래밭에 수로를 파고 있었다. 내 때보다 스케일이 배로 거대했다. 부질없는 조물주 놀이에 열중하는 대여섯명의 아동. 개미를 띄웠는지는 모르겠다. 그정도 규모라면 개미도 뗏목이 필요할텐데.

by 짙푸른 | 2008/06/26 21:26 | 트랙백(1) | 덧글(2)

안명

 1. '20년 후에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이처럼 실없는 질문도 없는데 그것은 올바른 주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년 후의 나에게 물어봐야지, 지금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종종 학생들에게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하라는 식의 격언을 서슴치 않는 교사나 학부모들이 있다. 이것은 겉보기에 좋아 보일지 몰라도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의 공부의 주된 목적은 그 목표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분될 수 없다. 이처럼 목표와 공부를 이분하는 것은 공부에서 성찰이라는 요소를 제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내해야할 노동으로 전락시켜버린다.
 나의 역사는 지금에서 시작해 지금에서 완결된다. 순간순간 태어나고 죽어갈 뿐이다.
 2. 누구라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해결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성장의 일부이다. 세상에는 어떻게 힘을 쓰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그러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있다. 그런 고통까지 감싸안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 역시 말할 수 없다.
 3. 미래는 항상 원하는 대로 결말나지는 않고, 과거를 뒤돌아보면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다. 
 상상한 바가 틀리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미래에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상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무섭기 때문이다.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피 엔딩도 없고, 짜여진 플롯도 없는, 무규칙하고 불특정한 운명이다.
 안명하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완성의 문제가 아니다. 미완성이 곧 완성이다. 안명하지 못하는 이러한 과거까지, 다 안명해야 한다.

by 짙푸른 | 2008/06/25 21:02 | 트랙백 | 덧글(0)

긍정적과 부정적

 토론에서 그 진행을 가장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마법의 구절 중 하나는 '~가 뭔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어휘를 생각없이 사용한다. 그리고 그런 두리뭉실한 언어 위에 사상누각처럼 지어진 논리구조에 만족한다. 이것은 또한 소통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물 중 하나로, 같은 단어를 서로 달리 이해하니 대화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으로 전락한다.
 대화에 방해가 되는 이러한 모호한 단어 중 대표적인 것이 둘 있다. 긍정적과 부정적. 이 두 단어는 호불호를 보여주는 것 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굳이 이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모든 정보를 이 두 범주로 분류하고 만족해한다. 가령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취하는 결단은 긍정적이고 그것을 훼방놓는 적의 잔꾀는 부정적이다. 이러한 범주화는 우리가 더욱 자세히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면 이것은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분석의 영역을 유아의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유아는 사물을 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뿐이다. 유아의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은 쉬우나 공허하다. 또한 작가의 지성을 모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정교히 설치해놓은 수많은 논리의 질곡을 건너뛴 채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로 이분시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긍정적과 부정적으로의 범주화는 어느 시점에서는 의미있는 방편일지도 모르나 그것 자체로는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by 짙푸른 | 2008/06/24 11:49 | 트랙백 | 덧글(0)

초등학생들의 축구

 오늘 아동 세 명이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보았다. 여자아이 한 명에 남자아이 둘.
 치마까지 곱게 차려 입은 소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왜 여아들은 스포츠를 하지 않을까? 초등학생까지는 남여의 체력이 엇비슷하다. 열심히 연습하면 축구에서도 소년들을 제칠 수 있는 것이다. 중학교 까지도 원한다면 농구나 축구 따위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녀들은 거의 스포츠를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여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피구라던지.
 이렇게 문화의 차이와 집단의 양분이 운동장에서 처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소녀들은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를. 소년들은 축'구'와 농'구'를. 비경쟁적이고 협동적인 '놀이'를 하면서 소녀들은 소녀가 되고 전체주의적이고 호전적인 '구기'를 하면서 소년들은 소년이 된다. 어떠한 크로스오버도 단지 극소수의 괴짜로 취급될 뿐이다. 나는 스포츠를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축구는 정말로 싫어했다. 쓸쓸하게 골문 주변을 서성인 것이 몇 게임이던가...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골도 넣어본 적 없다. 슬픈 유년기다. 
 생각해보면 축구 같은 단체 스포츠는 그 내부적으로 어떤 약점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항상 약한 아이들은 짐짝으로 취급된다. 강한 아이들은 우상화된다. 모든 남자가 스포츠를 할 필요는 없다.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체육시간에 강제로 아이들을 잔디밭으로 농구장으로 몰아 넣지 말아라. 약한 아이에게는 그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섬세하고 평화적인 신체 놀이를 장려하면 된다. 반대로 모든 여자가 스포츠를 안 할 이유도 없다. 여아들에게도 그 땀 뻘뻘나는 잔디밭의 질주를 체험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탈 젠더인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갑자기 말을 걸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일단 매점에 들어갔다 나온 후 물어보자. 매점을 나오자 그 아이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깝다.

by 짙푸른 | 2008/06/23 20:46 | 트랙백 | 덧글(0)

하늘 까페

 아침에 일어나니 천둥이 치고 있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방을 나섰다. 글도 쓰면서 있다가 곧 9시가 되었다. 운동회는 가기 싫다. 몰래 빠져도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1층 체육관으로 가는 척 하고 몰래 4층으로 갔다. 4층에 카페가 있다 들었다. 에라, 여기나 들렀다 가자.
 카페에는 나밖에 없었다. 얼그레이 차를 시켰다. 향이 좀 강했지만 맛있었다. 무엇보다 뜨거운 물을 계속 채워주어서 좋았다. 알지 못하는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들었는데 참 좋았다. 창 밖의 경치가 꽤 좋았는데 구름 흘러가는 것하고 노래하고 잘 어울렸다. 커피와 홍차에 관한 잡지가 있었는데 좀 훑어보았다. 만화책도 있었다. 중학생 때 봤던 만화가 있어서 반가웠다. 쿠키도 샀다. 그렇게 11시 되기 조금 전 까지 2시간 동안 있었다.
 내려가자 운동 경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11시 10분이 되자 떠났다. 나는 남은 쿠키를 같은 반 애들에게 나눠주었다. 솔직히 그거 혼자서 다 먹으면 살찐다. 양보다 질이다.
 차 안에서 잤다. 광나루 역에서 혼자서 내렸다. 미술사 스터디 하러 갔다. 먼저 와 있는 분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스터디를 3시간 정도 하고 식사를 한 다음에 다시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데 부모와 어린애들이 있었다. 흑인 두 명이 다가오더니 한 명이 애들에게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High Five!" 여자아이가 자신의 손을 4배 정도 되는 큰 손바닥에 짝 부딪쳤다. "Good~" 나는 다음 역에서 내리는 척 하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부인이 임신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애들을 보니까 어제 캠프에서 식사하다 본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식사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 먹고 엄마와 같이 일어나자 나에게 손을 흔들고 가는 것이었다. 깜찍하다. 보통 아이들은 낯을 가리는데...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해가 비추고 있었다. 중앙선은 야외열차라서 좋다. 햇빛이 사람들의 머리 뒤로 비친다. 눈부시다. 나는 내 청춘은 이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짙푸른 | 2008/06/22 20:47 | 트랙백 | 덧글(0)

휴가에 대하여

 사람은 휴가라는 것을 너무 양적으로 생각한다. 무릇 휴가는 질적인 것이다. 한 달 동안 어디를 투어 다녀오니 펜션을 전세놓니 해도 단 몇 시간 만의 산책만도 못할 수 있다.
 사람은 휴가를 위해 살지 않는다. 휴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만약에 휴가를 위해 산다면 그것은 너무 슬플 것이다. 일 년 동안 단 스무 일 정도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말은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는 사치가 허용된 사람이나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다 해도 휴가의 양적인 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봄이 되면 꽃구경을 많이도 간다. 여자랑 못 가서 쓸쓸하다는 총각들도 있고, 일에 치여서 남들 다 가는 벚꽃놀이 못 가봤다고 한탄하는 직장인들도 보인다. 나는 꽃구경을 가본 적이 없다. 그냥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벚꽃이 다 져갈 무렵, 버스를 타고 남산 쪽을 올라가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보니 푸르른 오월의 색채가 시야를 덮었다. 바람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실려 왔다. 나는 잠시 동안 그것을 보고 있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내가 내릴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나는 생각했다. 벚꽃놀이를 구태여 가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물론 가게 되면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거기에 집착해서 가겠다 못가겠다 하면 그것은 되려 배꼽이 배보다 큰, 고통이 만족보다 큰 줄다리기가 되는 것이다. 그 10분으로 충분했다. 휴가가 이틀이니 삼일이니 징징 울며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어느 해수욕장이 좋으니 어느 해외여행이 좋으니 구차하게 따지고 얽매이지 않아도 그 허름한 버스 좌석 위의 10분만으로 나는 심신이 정화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패스트 푸드처럼 모든 것을 압축해서, 한나절을 걸쳐서 볼 박물관을 한 시간 안에 바삐 몰아 본다거나, 소위 명소라는 곳들을 투어 버스로 빙 둘러서 등으로 관광을 한다거나, 이런 식의 구슬픈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보아야 한다는 압박감만을 낳을 것이다. 오히려, 적은 것으로 전체를 느끼라는 것이다. 홍순민이라는 궁궐 연구가는 이런 비유를 든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아예 흙더미를 산채같이 끌어모아서 산을 만들어버리고, 일본인들은 올망졸망 조그마하게 흙을 뭉쳐 놓고 이것은 산이요 하는데, 한국인들은 산의 자그마한 조각들을 가져다 놓고 거기에서 산을 느낀다." 얼마나 운치있고 자유로운 선조들의 풍류인가? 왜 휴가에 집착하여 또다른 고통을 낳고자 하는가? 기왕에 휴가를 즐기려면 집착을 버리는 것이 좋다.

by 짙푸른 | 2008/06/21 10:42 | 트랙백 | 덧글(0)

애니메이션

 한 4년만에 한국판 뉴타입을 사 본 것 같다. 내 인생 중 뉴타입이라는 잡지를 구매해 보고 만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오랜만에 무슨 애니가 뜨는지 확인이나 해 볼 겸 샀다. 애니라는 건 원래 신작 좇아서 보는 게 아니지. 신작 리스트를 보면 일정한 패턴에 맞춰 만든 작품이 대부분이지 뭔가 참신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화도 그렇지만 애니는 더욱 패턴을 좇을 수밖에 없다. 패턴을 깬다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은 의외로 보고 싶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작품을 '보고 싶다'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회의를 해 보는 게, 사실 나는 대부분 캐릭터 디자인만으로 만화나 애니를 볼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 같다. 그 그림체가 끌리느냐 안 끌리느냐가 내가 1차적인 판단을 내리는 무의식적인 기준이 되는 것 같다. 마치 영화를 영화 배우 얼굴을 보고서 결정하는 것처럼. 사실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서 추천받아 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표지만 보고 내용을 어림짐작하는... 그래서 요즘에는 그러한 방법론을 배격하기 위해 무조건 1화를 읽어 보고 결정하는 식으로 만화를 고른다. 그런데 애니의 경우에도 그게 가능할지는.
 그리고 또 하나, 유명세 회피의 병. 이건 반쯤 의식하고 있었지만 일단 나는 어떤 작품이 유명하면 보기가 꺼려지는 것 같다. 어떤 작품은 사람들과 같이 유행 타면서 보는게 재미있기도 한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나는 뭐랄까, 자기가 스스로 발굴해 낸 작품을 더 즐기는 것 같다. 그것이 왠지 더 은밀하기 떄문이다. 작품와 나만의 은밀한 소통. 남들이 보는 것을 따라 본다는 것은 그러한 느낌이 없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요소는 실제로 크다. 자신이 혼자서 본다는 것과 남들과 같이 본다는 것은 작품 자체의 감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양극단 중 택일한다. 아무와도 그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본격적으로 유행 타고 리뷰같은 것을 써가면서 같이 보거나.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대부분의 작품을 나는 혼자서 봤다.

by 짙푸른 | 2008/06/20 08:11 | 트랙백 | 덧글(0)

B급 인간

 근 3년, 아니 2년 나의 생활은 사회적 능력에서 보았을 때 C에서 B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던것 같다. 나는 B급 인간이다. 중간은 가는데 멍청해서 실수를 곧잘 한다. 가끔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그것은 허상. 자기만족. 가끔씩 번득이는 가능성. 그런데 그것은 B급이라면 누구나 있다. 사회는 A급을 요구로 한다. A급이 더 잘났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에 좀 더 필요한 부품이라는 말이다. A급은 늦잠 자지 않고 실수는 가끔밖에 하지 않고 일정에 철저하고 자잘한 고민을 한다. 완전한 타의에 의한 사고 외에는 절망이라는 것을 경험해 볼 일이 없는 부류다. 나는 A급이 되고자 하고 있다.
 사실 이미 늦었다. B급은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 대학은 B급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러한 것이 이미 도무지 상관이 없다. 그렇다. 나는 C에서 B로 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A로 갈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다른 어떠한 부차적인 팩트는 필요가 없다. 단지 A로 갈 뿐이다.
 교사는 나를 패배자로 보았다. 어떻게 힘을 내면 갱생이 가능할 정도인, 그런 부진한 자로.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힘을 낼 수 있으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느냐고... 힘을 못 내니까 B급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사실은, 네 그렇습니다. 저는 패배자입니다. 근데 이거 아세요? 패배자도 앞으로 나아간답니다. 느리적거리며 기어서 나아간답니다. 그것은 게을러서인데 사실 게으르니까 패배자죠. 게으름을 이기기 위해서는 게으른 걸음이 언젠가 뜀박질이 되도록 계속 기어갈 수밖에 없어요. 네, 패배자도 나아갑니다. 패배자가 나아가는 것은, 그것은 사실, 뭐랄까, 빛나는 내일이라던지, 희망찬 미래라던지, 그런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사실 현실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패배자는 존재할 이유조차 잃어버린다고 스스로 생각하거든요. 사실 골인을 하지 못해도 좋아요. 자동차 게임 하다 보면 리타이어라는 거 있죠? 8등으로 끝없이 외로운 길을 달리다 갑자기 타의에 의해 뚝 멈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너는 졌다! 하며 갑자기 선전포고되는 그 무력한 패배. 리타이어해도 좋아요. 아니 사실 리타이어 할겁니다. 아마 그렇게 보는게 옳겠죠. 뭐 골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만약이죠. 사람이란 항상 만약을 가정하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절망하게 되니까, 만약이라는 건 아예 생각을 안하는게 건강에 좋습니다. 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앞으로 갈겁니다. 울지 않으려고.

by 짙푸른 | 2008/06/19 23:50 | 트랙백 | 덧글(0)

최근 본 만화 1

<최강전설 쿠로사와>
<폭음 열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y 짙푸른 | 2008/06/18 23:12 | 트랙백 | 덧글(0)

관계맺기의 유형의 다양성

 사람들이 말하는 내성적이거나 소심한 사람이 있다. 조금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관계맺기를 어려워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자신이 권력상 더 우월한 위치에 있을때(예: 교사, 상관 등)종종 그 소심한 사람들을 더 외향적이고 사교적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야심에 불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딱히 자신이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성격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의 상대성에서 임시적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말수가 적은 학생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던지. 홀로 떨어져 있는 사람을 억지로 사교회에 끌고 간다던지. 결과는 종종 절망적이거나 기만적이다. 그 비사교적인 아이들은 자신의 철의 성문을 끝끝내 열어주지 않으며 그런 문을 열어젖히려고 거듭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호의가 무시된 듯한 불쾌감을 느끼며 포기하기도 한다. 아니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친근하게 된 것을 마치 자신의 노력에 의한 성과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결과가 어느 쪽이든 그런 노력은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불쾌하고 거슬린다. 자신은 나름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이고 마음만은 고맙지만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베푼다면 그것은 이미 독선이다. 무엇보다 제일 기분이 언짢은 것은 자신이 무슨 자폐아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그러한 선의에는 이미 우월감과 계도욕이 짙게 깔려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부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흔히 말하는 소심한 사람들은 단지 관계맺기의 유형이 다른 것 뿐이다.
 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친구가 한 수십명 있고 인맥이 넓으면 그것이 좋은 관계인가? 술자리에 자주 참석하고 MT에 따라 나가면 그것이 좋은 관계인가? 그것은 수많은 유형의 관계 중 하나일 뿐이다. 말이 없는 사람들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끼는 것이다. 친구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사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고양이와 대화하고 자신과 대화하고 신과 대화하는 데에 시간을 더 보낸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말로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지.

by 짙푸른 | 2008/06/17 21:04 | 트랙백 | 덧글(0)

여자의 젖가슴


 여성 속옷 관련 직업을 오래 해온 사람이 쓴 글에서 읽은 바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슴이 큰 여성은 미련해 보인다는 소리가 남자들 사이에 농담처럼 나돌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지금, 남성들이 여성의 몸매를 결정하는 기준 중 몰라도 80%는 '가슴의 크기' 인 것 같다.
 개화 이전 한국에서 찍힌 사진들을 보면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수치심 없이 젖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 시절에 가슴이 크면 젖이 많이 나오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들었지 더 매력적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 가슴이라는 기호가 여성의 성적 권력과 직결되는 것은 근래에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며 매스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브라지어라는 속옷은 미사일처럼 솟아 있는 인공적인 가슴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크기 역시 남성이 '섹시'하다고 느껴지는 사이즈는 평범한 동양인이 가질 수 없는 사이즈다. 그렇게 큰 가슴을 얻기 위해서는 수술을 거칠 수밖에 없다.
 옛 중국에서는 한때 '의족'이라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작은 발을 가진 여성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딸을 좋은 신부감으로 만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발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칭칭 동여맨 채 키웠다. 지금의 '가슴 열풍'은 후대에 의족 풍습 정도로 여겨질 것 같다. 비대한 유방을 강조하는 여성들이 실린 잡지를 유물로서 탐구하면서 미래의 남녀는 진저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만들어낸 또다른 기이한 '만들어진 성적 코드'를 보지 못한 채.
 '예쁜 애들이 일도 잘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성적 코드의 변화에 주목했으면 한다. 그것은 아마 '예쁜 애들이 일도 잘 할 것이다'라는 자신의 믿음이 실상을 그러하게 보도록 만들거나 예쁜 사람들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러한 기대감 덕에 일 능률이 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by 짙푸른 | 2008/06/16 17:11 | 트랙백 | 덧글(2)

내가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 섹스와 우정의 분리

 연애란 우정보다 고차원적인 관계로 해석되는 것으로 일대일 관계이며 그 구속력과 신체적 접촉을 특징으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성적 구속이 정신적인 구속과 동시에 행해진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만 취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연애 = 우정 + 성애 + 구속>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나는 연애를 하지 않는데 이 세 요소의 조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구속은 말할 것도 없이 쓸모가 없다. 그것은 우정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된다. 자발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상대방에게 구속시키는 것은 나름대로 좋을 수가 있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서 똑같은 구속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채권자와 채무자의 종속관계이지 우정은 아니다. 
 우정하고 성애의 조합 정도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우정 + 성애> = <우정보다 지고한 그 무언가> 로 착각하는 것이다. <우정 + 성애> = <우정 + 성애> 이다. 그 어떤 상위개념으로도 승화시켜서는 안된다. <우정 + 비즈니스> 나 <우정 + 사제> 혹은 <우정 + 부모자녀>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정 + 성애> 는 수많은 우정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 A가 남성 B와 교분을 나누었을 때, A가 B가 못생겨서 섹스를 하기 싫다고 말하면 B는 상처를 받을 이유가 있는가? A와의 더 깊은 관계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다. <섹스 + 우정>은 우정보다 더 깊거나 지고한 개념이 아니다. 섹스 없이도 그들의 관계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것은 서로 농구를 한다거나 비디오 게임을 한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같이 하면 뭐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진정한 우정이라면 상대방의 성적 취향을 고려해줘야 하지 않을까? A가 C와 섹스를 한다면 그것은 B를 C보다 덜 중요한 관계로 생각한다기보다는 단지 C가 더 섹시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성적 매력이 높은 파트너의 독점'이라는 원시적인 관계론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연애와 우정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만 있지, 섹스와 우정을 분리시켜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성적 권력을 동일시하는 문화코드 때문이기도 하다.

by 짙푸른 | 2008/06/15 22:21 | 트랙백 | 덧글(2)

 전에도 쓴 바 있듯이 나는 근래 들어서 꿈을 아주 디테일하게 꾼다. 어제 오후 9시에 잠들었는데 오늘 오전 11시에 깨어나면서 나는 그야말로 여러 신변잡기한 꿈의 시리즈를 꾼 듯 하다. 이번 꿈은 몽롱하고 뒤섞여 있어서 그 서사과정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 중 대부분은 벌써 기억에서 잊혀졌는데 기억나는것이 몇개 있다.
 1. 어렸을 적 소꿉친구의 집을 다시 방문했는데 왠일인지 바지를 벗고 속옷차림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후에 그 일을 후회하는 나.
 2. 성인물을 보다가 어떤 집단(어머니 포함)에게 발각되었다. 나는 죽고 싶어질만큼 놀림당했다. 이상하다. 원래는 그런 일로 굳이 부끄러워하거나 하지는 않는데...
 (1~2는 가장 긴 꿈이었지만 애매해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느낌만은 선명한데 말하자면 비참하고 부끄럽고 추방당하고 조소당하는 그런 꿈이었다. 과거 친구들도 몇 명 등장했는데 그들의 역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라는 소재도 연관이 되어 있었다.)
 3. 거대한 극장에서 내가 리모콘을 손에 쥔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 외에 영화를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성인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다른 영화를 틀었다. 하나는 퍼스트 건담의 영어 더빙판이었고 하나는 퍼스트 건담의 실사판이었다. 실사판을 보고 있자니 그 사람이 와서 다른 걸 보겠다고 리모콘을 달라고 했다. 나는 넘겨주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성인물에 미친 녀석이나 건담 매니아인줄 착각할 여지가 있는데, 사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꿈에는 자신의 욕구나 두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소재들이 때때로 비중있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4. 이것은 애니로 꾼 꿈이다. 내가 애니의 한 과정에 있었는데 경쾌한 분위기에서 만화로 그려진 어떤 친구들(여성들이었는데 모 만화가의 여성들처럼 생겼다. 분명히 성욕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냥 친구들이라는 그런 분위기였다.) 과 아주 재밌게 물에 빠지고 빠트리면서 놀고 있었다. 내가 물에 빠지고 올라 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고 조용하게 바뀌었다. 친구들은 나를 보지 않고 무릎을 모아 앉아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5. 이것은 마지막으로 꾼 꿈(아마 10시 반 경에서 11시까지 정도)인데 가장 선명하고 서사과정이 뚜렷하다. 어쩌면 단지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시점부터 서술을 하자면 편의점에 가서 설탕바른 땅콩과 또 무언가를 섞어서 주문하고 있는데(편의점에서 이런 것을 사 먹은 기억은 없다) 갑자기 한 40m 밖에서 어떤 검은 옷을 입고 푸석한 머리를 하고 있는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아마 칼을 들고 있어다.) 아마 기차역 안에 있는 편의점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즉시 어디론가 도망쳤다. 나도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는데(여기서 설정 무대가 기차역에서 빌딩으로 바뀌었다. 지하에 있었으므로 1층으로 올라가서 밖으로 나가는 게 더 현명하리라고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도망쳤을 것으로 짐작해 나는 왠지 차별화를 두고 싶었으므로 지하 층계로 도망쳤다.
 지하층은 여러 음식가게들이 들어서 있는데 다 고급 음식점처럼 보였다. 클래식 음악이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 괴한에 대해서 알려 주고 싶었지만 어째선지 그러지 않았다. 한 통로로 들어가자 음식점이 아닌 그냥 방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어떤 부자가 소파에 앉아 게임기 비슷한 것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의 TV 밑의 서랍에는 여러 DVD나 음반이 꽂혀 있었다. 창 밖으로는 건물들이 보였다.(지하였는데 어째서?) 그 우측 통로에 있는 한 가게에서는 부부가 자신들이 먹은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 좌측 통로로 나가자 어떤 아줌마가 와서 김치 대접시를 내려놓았다. 불고기도 보였는데 색이 예쁜 핑크색이었다. 늙은 남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샌드위치를 시켜 먹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양만 많지 질은 별로로 보이는군.' 그 옆에는 KFC가 보였다. 그 광고판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왜 이런 비싼 곳에 패스트 푸드점이 있는 것일까? 나는 순간 경제 선생님이 말해준 파리인가 어딘가에 있는 가장 비싼 맥도날드를 연상했다. 그 옆에 조금 떨어져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후로는 기억나는 바가 없다.
 이번 꿈, 특히 5번 꿈을 꾸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나의 꿈은 종종 무의식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일상 경험의 반복인 것 같다. 5번 꿈에도 내가 흔히 생각하고 경험하고 하는 자잘한 것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by 짙푸른 | 2008/06/14 12:02 | 트랙백 | 덧글(0)

모나 리자 스마일과 아다치 페이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즐겨 사용한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는데 인물의 일부분을 그림자로 처리해 없는 부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기법이다. 너무 유명해 말할 것도 없지만 '모나 리자 스마일'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웃는 데 주로 쓰는 근육은 입언저리와 눈옆 근육인데, 이 부분을 그림자로 처리함으로서 볼 때마다 다른 미묘한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나 리자는 지나치게 들뜨거나 우중충해 보이지 않고 차분하고 상냥하면서도 깊은 차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다치 미츠루 만화의 등장인물들 역시 모나리자 스마일을 짓고 있다. 내가 아다치 페이스라고 부르는 이 무감한 표정은 아다치 만화를 매력있게 만드는 비결인 것 같다. 청춘 만화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은 이미 청춘 같은 것은 지극히 초탈한 것 같다. 환갑을 앞둔 노인들처럼...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고, 말 안해도 알고 알아도 말하지 않고. 이러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시크한 매력이 저 간단하고 정형화된 얼굴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만화란 대단하다.
 만화가 원래 과장된 표현을 통해 원의를 전달하는 매체라면 아다치 만화는 그러한 특성을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물의 표정은 붕어빵처럼 틀에서 찍어낸 듯 하다. 주인공들의 성격도 그렇다. 비슷한 성격과 외모를 가진 주인공을 여러 작품에 걸쳐서 출연시키는 것을 스타 시스템이라고 박인하라는 만화평론가가 이름붙인 적이 있는데 그러한 스타 시스템을 아다치 미츠루는 철저히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때그때의 유행에 맞춰 변화시켜가면서.
 이 동일한 캐릭터와 표정의 반복을 통해 아다치 미츠루는 흡사 모나리자 스마일 같은 다양성을 창조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다치 만화의 캐릭터는 알 수가 없다. 물렁해 보이던 개그 캐릭터가 한 순간 진지하게 안경을 벗어들기도 하고, 경쾌하고 발랄한 캐릭터가 슬프게 뒤돌아서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그런 만화를 읽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런 건 노인들의 얘기지 청춘 얘기는 아니란 말이다. 청소년기란 뭐랄까 더 바보같고 시끄럽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죽고 싶어지는... 아니 그건 내 얘기던가.

by 짙푸른 | 2008/06/13 22:42 | 트랙백 | 덧글(0)

행복으로부터의 탈주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까? 그것에는 무엇이든 상품화하고 수치화하려는 우리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즉, 모든 경험이든 행복이라는 하나의 양적 수치로 환산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경험은 그러한 수치를 최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 다양한 경험이라는 것도 단지 반복되는 행위가 가져오는 지루함을 달래서 더 많은 행복을 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좋아한다'라는 수식어는 기만적이다. 호오란 그렇게 이분법적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를 좋아하는 것과 바나나를 좋아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느낌일 수 있다. 심지어 바나나를 사과보다 더 좋아한다고 해도, 바나나가 사과를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허무하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면 음식이나 여색, 술담배나 약물이 가져오는 쾌락이 가장 지고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절대로 100%의 만족을 주지 못한다. 행복이 만족이라면 왜 살아가는가? 불행의 근원인 이 삶을 아예 단절해버리는것이 더 현명하지 않은가? 행복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는가?
 행복은 단지 불행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배고픈 사람이 그 주림을 불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며, 무언가 달고 맛난 것을 먹으려는 그의 욕구는 행복으로의 질주가 아닌 불행으로부터의 탈주인 것이다. 이 둘은 차이가 있다.
 내가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달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달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수치로 환산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인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에서 탈주할 수 있을 것이다.

by 짙푸른 | 2008/06/12 02:38 | 트랙백 | 덧글(1)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

 약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때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타인의 협력이다. 둘은 승리다.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인파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고 언제 썰물로 빠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조속하고 확실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언젠가 시들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리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타인에 이끌려 참여한 사람은 타인이 시들해지면 자신 역시 시들해진다. 그것은 타인의 연대와 자신의 의지를 동일시하는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타인의 힘은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행운과 같은 것이다. 하나둘 떠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결국엔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혼자서 싸우고 있었다고.
 6만이 6천이 되고 6천이 600이 되고 600이 60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60들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그들 하나 하나밖에 없었다고. 60은 6이 되고 6은 1이 될수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빠져나간 5만 9천 9백 99명을 미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이 머물다 간 것 만으로도 고마운 것이다. 그 1이 0이 되지 않는 이상은 졌다고 말할 수 없다.
 촛불시위가 승리할까? 어떤 형태로든 시민이 바라는 바를 얻을까? 패배하리라고 예언할 수도 없지만 승리의 단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약자는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약자는 다만 싸운다. 그것이 약자의 실존이다.
 바로 눈앞의 패색에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승리를 희망할 수는 있다. 다만 장기전을 예상해야 한다. 승부처는 5년 후다. 우리의 적은 이명박이 아니다. 그는 이미 승자다.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이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맵게 회초리를 때리고 있다. 5년 후, 50년 후, 지금의 우리들을 기억해 준다면 이 촛불들도 결코 무력한 환영만은 아니리라.

by 짙푸른 | 2008/06/11 17:16 | 트랙백 | 덧글(0)

낙태

 나는 낙태의 전면 허용을 찬성하는 사람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단 빼놓을 수 없는 논의는 배아가 과연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자명한 것으로 전제될 때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선결조건은 1) 종적으로 인간일 것 2) 인격체의 잠재성을 지닐 것 이다. 전자는 성립하나 후자는 성립하지 않는 경우로 뇌사 등 불가역적 코마 상태에 빠진 사람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성립하지 않으나 후자는 성립하지 않는 경우로 유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원숭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갖게 된 순간부터 그것은 인간이 된다.
 낙태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피임 실패 등 변심에 의한 낙태, 하나는 강간 등 타의적 임신에 의한 낙태, 하나는 기형아 출산을 저지하기 위한 낙태이다. 인간을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자명한 것으로 전제될 때 그것이 살해가 아닌 정당방위임을 입증해야만이 낙태가 허용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의 예를 들 때, 나의 선택이 무고한 바이올리니스트를 결과적으로 죽게 할지라도 바이올리니스트의 죽음의 원인을 내가 제공하지 않은 이상 내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므로 타의적 임신에 의한 낙태는 완전한 정당방위이다. 같은 논리로 신생아살해도 용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생아를 국립 보육원에 보내는 것과 살해하는 것은 출산모의 권리 침해라는 면에 있어서 하등 차이가 없으므로 더이상 정당방위라 할 수 없다. 죽이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변심에 의한 낙태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논거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연할 것이다. 기형아 출산 우려에 의한 낙태는 어떤가? 배아를 인간으로 본다면 배아의 생사여탈권은 배아에게 있다. 즉, 기형아가 자신의 인생에 만족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임산부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임신은 언제나 기형아 임신의 위험성을 내포하므로 그 책임 역시 부부에게 있다. 정당방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by 짙푸른 | 2008/06/10 22:38 | 트랙백 | 덧글(0)

종의 보존

  종은 어떻게 해서 보존되고 있을까?

 보통 많은 인간들이 정력을 쏟는 숭고한 일과는 후세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즉 그들의 세상이 완결점이 아닌 과도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기에 지워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 인류는 면면히 세대를 이어갈까? 인간이라는 종이 무구히 지속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부부가 아이를 가질 때 인류를 계속시키기 위해서 자손을 낳지는 않는다. 그들은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로 자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이기심이 수없이 중첩되어 어쩌다 보니 인류는 수천 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매우 신기하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가 지속될 이유는 없다. 어느 역사적 시점에서 대다수의 인류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기를 원하면 인류는 그곳에서 끝장나는 것이다. 사실 나는 가장 설득력  는 인류멸종의 시나리오는 자연재해나 세계전쟁, 전염병 보다는 더 시시할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늙어 죽어 없어졌다. 혜성 충돌이나 대빙하기는 할리우드 영화를 위한 소재일 뿐이지, 그러한 별 볼일 없는 피날레가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산다고 한다. 세상을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들은 사실 자식 크는 보람에 사는 부모와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은 신이 내려준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섹스를 하다 보니 어쩌다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우리가 선택해서 안 만들 수도 있다.

 

by 짙푸른 | 2008/06/09 23:43 | 트랙백 | 덧글(0)

유골찾기

 나는 유골찾기의 당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왜 유골을 찾을까? 그 사람의 뼛조각을 모아서 어쩌겠다는 것일까.
 만약에 그럴 만한 여건이 된다면 그 사람의 신체의 잔해를 어루만지는 것이 하나의 감상적인 회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에 굳이 전문 인력을 투여해서 몇날 몇달씩 시체를 찾아 헤치는 것은 시간과 노력 낭비이다.
 굳이 유골찾기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시체를 너무 귀하게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묘자리로 산이 채워지고 장기가 모자란다. 나는 근시일에 장기 기증서를 작성할 생각이다. 몇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싱싱한 각막과 신장을 대체 무슨 미명하에 태워 버리거나 묻혀 썩혀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죽은 살덩이를 자르고 헤치는 것이 그렇게 보기 싫은지 지금 많은 유족들의 아집 때문에 장기가 너무 부족하다.
 너무 비정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감성적인 인습도 그것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사를 드리는 것이 가족들이 결집할 기회를 주고 없어진 사람을 추억하는 계기 정도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 부치랴 국 끓이랴 양가의 여인들을 혹사시키며 그것은 더이상 아름다운 전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그것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매정하게 뿌리뽑아야 한다. 그리고 뿌리뽑을 수 있다. 사실 시체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시각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을 혼동하는 원시적인 인식구조의 잔재에 불과하다. 우상숭배처럼 말이다. 없어져도 전혀 해될 것은 없으리라.
 나는 흙이다. 나는 수억년의 시간동안 흙이었고 그 사실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작 몇 년 더 인간의 형태를 하겠다고 그 고집을 부리다니, 말도 안될 일이다. 만약에 내가 눈사태에 떠밀려 설원 아래 묻혀 즉사하게 된다면, 파도에 떠밀려 새까만 해저에 침잠한다면, 나를 그냥 그곳에 쉬도록 내버려 두고, 살 사람들은 계속 살아라. 쓸데없이 나의 부스러기를 애태워 찾지 말고.

by 짙푸른 | 2008/06/08 22:14 | 트랙백 | 덧글(2)

내가 정치참여를 하지 않는 이유

 정치참여를 하기 위해 무언가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민이라도 참여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이 사회에 관하 잘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참여를 유보한다.
 나도 한때 정치참여를 활발히 해 보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인상은 행동보다 성찰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칫 공허한 몸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없이 보았다. 몸이 이미 어느 한 방향으로 굳어져버려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을. 종종 정의의 투사가 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정의감은 가식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증오에서 기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움직여주지 않는 절망감. 세상을 바꾸리라는 숭고한 의지. 개선되고 있다는 희망. 어느 하나도 자신이 적으로 삼는 사상이나 단체에 대한 증오에 기반한다.
 그런 것도 안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공부하고 싶다. 물론 종착점은 없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내 짧은 지식을 믿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쯤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순간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머리를 좀 식히고 싶다. 쿨한 척 한다고 비난을 받더라도, 이것 역시 내 정치적 선택이니까, 소위 행동하는 사람들의 선택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무표도 표다. 나에게는 이유없는 맹목적인 지지보다 이유있는 중립이 낫다.

by 짙푸른 | 2008/06/07 22:14 | 트랙백 | 덧글(0)

주캐릭터주의적 4컷만화

 데츠카 오사무는 말한 적이 있다. 4컷만화를 잘 그리는 사람은 모든 만화를 잘 그릴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을 아즈마 키요히코의 만화를 보기 전까지 실감하지 못했다.
 <아즈망가 대왕>은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봤는데 별로였다. 그러나 나중에 단행본을 읽고서 이 작가의 뛰어난 연출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만화가로서의 진수를 보여 준 것은 <요츠바랑!> 이었다. 짧은 독서량을 가진 나이지만 이 작품처럼 컷을 잘 배치하는 만화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의 4컷만화는 데츠카 오사무가 말하는 4컷만화와는 별개의 장르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흔히 일본 만화의 재미요소가 서사에서 캐릭터로 바뀌어간다고 말하는데, 4컷만화가 그 선두주자인 것 같다. 아무도 4컷만화에서 위트를 원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4컷만화 단행본을 집어들면 정말 아무런 내용도 없다. 말 그대로 내용 없음이다. 어떻게 글로 풀어쓸 수가 없을 정도로.
 사실 <아즈망가 대왕>도 해학은 없지만 캐릭터성으로 승부하는 그러한 부류의 작품이다. <아즈망가 대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럭키 스타>가 왜 인기가 있는지 스스로 읽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하게도 3번 정독할만큼 재미있었다. 아무 내용도 없는 만화를.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코나타가 귀여워서였다. 오덕 오덕.
 사실 4컷 만화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 만화가 인기를 모는 이유는 90%가 그 캐릭터성이며 서사를 주무기로 삼는 만화는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개성이 된다. 서사가 없다고 요즘의 4컷만화를 배척하는 것은 일본만화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이러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서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예전의 일본 만화도 역시 주캐릭터주의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당연한 듯이 4컷만화가 서사를 버리고 있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지금의 작가들은 마츠모토의 만화나 루미코의 만화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메텔이나 라무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by 짙푸른 | 2008/06/06 23:51 | 트랙백 | 덧글(0)

강요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라거나,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거나, 이런 소리는 수없이 들어 왔지만, 나에게 있어서 별 의미가 있는 항변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나는 '의견을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누군가가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적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폭언을 한 적도 없다. 내 생각이 옳다고만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애초에 대화 자체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화라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오만함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 내가 그들이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오만하다거나 강요한다거나 등의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지 하고 열심히 추문했을 뿐인데 폭력적이라는 소리가 듣는 경험은, 여러 번 해보지만 기가 막히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저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는 의견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 같다. 아마 그러한 의식조차 스스로 갖지 않을 것이다. 대개 새로운 것은 불편하다.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도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막연한 인식과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러한 기대조차 뛰어넘는 새롭게 새로운 것이 그들에게 밀려올 때 극히 정상적인 반응은, 반격이다.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고 또다른 폭력으로 배재해야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전에도 말했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나 자신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런 폭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사람들조차 배재하지 않는다.

by 짙푸른 | 2008/06/05 20:13 | 트랙백 | 덧글(0)

역사 교과서에 대한 생각 1

 여러 가지 역사 중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는 근현대사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와 가장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역사가 관성으로 움직인다고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화살이 이러한 방향으로 어떻게 쏘아 올려졌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근 1, 2세기만 깊게 보아도 어느 정도 그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
 물론 호기심은 끝이 없고 19, 20세기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서 미국이 군사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는지 또다른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 이전의 역사를 공부해 나가야 한다.
 인문 서적 중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책은 소설책 뿐이다. 역사서나 철학서는 어느 장(章)부터 읽어도 무관하다.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의 첫 장이 선사 시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역사라는 것이 수학이나 과학처럼 밀폐된 실험실 안의 함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인과고리를 좇는 학문이라는 것을 가정할 때, 결과를 보고 원인을 추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조선사가 기초고 근현대사가 심화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역사 교육의 기초는 현실인식이다.
 동기부여의 문제도 있다. 1만 2천년 전 영장류들의 고고학적인 흔적부터 역사를 배우게 되는 것이 학생에게 과연 어떠한 흥미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 상하통일의 시대와 지리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시간적으로도 다른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중학생이 이집트사를 배우게 되면 막막할 수가 있다. 반면에 근대 문화를 이해하려면 서방의 르네상스를 이해해야 하고, 르네상스를 이해하려면 14세기 이탈리아인들이 그토록 회귀하고자 열망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를 이해해야 하고, 고대 그리스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뿌리인 고대 이집트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러한 수순으로 가르치는 것이 학생의 주체적인 학습 태도를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by 짙푸른 | 2008/06/04 12:27 | 트랙백 | 덧글(0)

아크바 애프터눈 시음

 어제 도착한 아크바社의 애프터눈입니다.
 영국에서 주로 마시는 차는 아침에 마시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오후의 티타임에 마시는 차인 잉글리시 애프터눈으로 나뉘어지는 듯 합니다. 아크바는 101년동안 홍차를 제조해오고 있는 회사인데 악바르(Akbar)는 인도 무굴제국의 대표적인 성군이라고 합니다. 왠지 좀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지는 네이밍 센스지만 100년 전 붙여진 상표이니 그럴만도 하죠.
 가격은 250g에 2만 5천원입니다. 비싸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한 달 동안 소비하는 음료의 가격을 생각한다면--차로서 음료를 대체한다는 전제하에--오히려 절약 수준입니다. 더욱이 듣기로는 아크바社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보급형 차를 생산하는 회사라고 하더군요. 다른 브랜드는 3만 5천원 내외였습니다. 대체 무슨 비상한 향미가 있기에 만 원이나 더 비싼 것일까요. 그렇게 사치스런 차는 무슨 맛일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일단 어느정도 차 맛을 모르고서야 아마 그 놈이 그 놈으로 느껴지겠죠.
 저는 우유를 마시지 않아 대신 두유를 넣었습니다. 맛은... 씁니다. 그도 그럴것이 카페에서 파는 것은 티백이라서 향이 미미한데다가 크림과 시럽을 담뿍 담아 그 본디의 씁쓸한 맛이 거의 남아있지 않죠. 그래서 두유를 좀 더 넣었더니 두유의 비린향에 홍차향이 가려지는 듯 했습니다. 두유는 조금만 넣고 꿀이나 설탕을 넣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 차를 마시면서 든 느낌은, 사람들과 같이 마시면 즐겁겠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왠지 녹차나 커피는 혼자서나 두 명이 마신다는 맛인데 비해, 이런 차는 다과회 같은 수다떠는 자리에서 마셔야 할 것 같은 맛이었습니다. 그래봤자 같이 마실 사람도 주변에 없지만 말입니다.
 시음차로서는 실론, 브렉퍼스트, 얼그레이가 티백 한 개씩 왔습니다. 애프터눈을 제대로 마시게 된 후에 천천히 시음해봐야겠군요. 아침인데, 한 잔 더 마시고 학교에 가야겠습니다.

by 짙푸른 | 2008/06/03 05:46 | 트랙백 | 덧글(6)

성격에 관해서

  성격은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비중이 큰가에 대해서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답이 갈린다. 나는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왔다. 어느 면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미취학 아동들을 관찰한 결과 그러한 믿음에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자라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 각기 상이한 성격을 형성한다는 사고에는 분명 결함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어난 지 5년 남짓한 그 아동들의 성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각양각색이었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 조용한 아이, 사교적인 아이, 감성적인 아이. 그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강렬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개성을 잘 관찰할 수 있다. 그 결과 나는--어렸을 때의 나 자신을 포함해서--미취학 아동들이 각기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짐작했다.
 어떤 한 아이는 매우 식탐이 강해 보였다. 그 아이는 자신의 모친에게 집에 있는 특정한 음식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반복해 주장했다. 그 모친은 그 음식들의 향촉미에 대해 자세히 서술해 주느라 진땀을 빼는 듯 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안정되었다. 아주 감각적인 것을 지향하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그러한 감각적인 것을 잘 추구하지 않고 추상적하고 모호한 이미지에 머무르는 성격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은 주로 말수가 적다.
 또 어떤 아이는 사람들과 잘 친밀해지는 듯 했다. 알고 지내던 한 아동이 있었는데 어느 날 오랜만에 길에서 만났더니 극히 반가워하며 내 팔을 잡고 반복해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지극히 사람을 꺼리는 아이들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매우 내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밖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나가 오도록 나의 모친이 나에게 강제했을 정도였다. 축구를 하느라 하교하는 것도 잊어버리는 또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은 남녀 구분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물론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은 대부분 학교나 사회가 강요하는 것 같다. 학교와 사회의 경험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마모시키는 것이다. 마모시켜서 각자의 연령, 성격, 지위에 적합한 새로운 성격을 부과한다. 학교나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성격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성격에 놀라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특정한 지위의 사람은 특정한 성격을 갖고 있으리라고 미리 예측하는 바에 대개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적인 내면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당위로서 인식되기도 하는 것 같다.(예: 40대나 된 남성이 젊은이처럼 굴면 꼴불견이다.) 그것은 신체와 함께 태어난 성격에 따르기보다는, 그러한 직위의 선배들에게서 물려받는 듯하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일정한 덕목들을 내면화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디의 개성에 초점을 맞춰 소외되는 아동 없는 대인교육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by 짙푸른 | 2008/06/02 15:35 | 트랙백 | 덧글(0)

大覺


 

 
역시 본문과 관계없는 동영상. 나카지마 미유키의 <두 사람은>의 개인 공연 영상이다.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창녀와 건달이 사랑에 빠져 마을을 떠난다는 서사적 곡이다.


 오늘 예배에서는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도 드렸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배는 내가 하숙하는 집단의 의무여서 매주 드리고 있다. 원래는 자거나 딴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내가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위장만은 아니다. 그것은 발상의 전환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와 안 맞는 집단과 나를 분리시켜 생각해왔다. 그리고 나와 맞는 집단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집단에서조차 일종의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퇴출당하거나 탈퇴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유용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나는 나에게 무작정 화를 내는 한 사람을 보고 생각해보았다. 그는 정말 눈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때까지 든 느낌은 혐오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움이었다. 그 사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사람과 같으리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以有涯 隨無涯 殆已. 유한한 삶으로 무한한 앎을 좇으면 위태하다. 나는 신이 아니다. 무한하고 경계가 없는 道의 견지에서 보면 나나 그 사람이나 같이 말 그대로 무한히 멍청할 뿐이다. 장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지에 대한 찬양이 아닌 이러한 역설이다.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두려워해서 도망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집단을 찾아 그곳으로 귀의했다고 쳐 보자. 그렇다면 나와 그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의 문제의식이 바뀌었다. 문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를 없애는 것이다. 나를 없애서 어느 사람들과도 같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필요하다면 기독교도로도 힌두교도로도 불교도로도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를 살리는 것이다. 可以保身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장자의 역설이다. 주체를 파괴함으로서 주체를 보존하는 그가 말하는 眞人으로의 길이다.
 나는 내가 기독교도들에게 오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독교도로서 행세하면 내가 최면에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무교인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여 그곳에 안주하면 나는 기독교인을 만날때마다 불편할 것이다. 또한 나 역시 스스로 간파할 수 없는 아집과 편견에 갖힐 지도 모른다.
 사람은 집단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장자가 말한 것은 避世가 아닌 安世였다. 어떠한 유토피아를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집단에 머물든 편히 하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心齋, 자아소멸이 필요하다.
 그것이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을 의미할까? 그렇게 따지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잠재된 폭력성을 모르고 안주하는 사람들과 하등 차이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앞서 말한 양비론, 상대주의가 필요하다. 즉, 모든 지식은 유한하고, 폭력을 배제하는 나 자신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행할 수도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넘어 관찰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 중요한 것은 말없이 듣는 것이다. 나는 오늘 밤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내가 만약에 사람들과 같이 참선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불교도가 될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常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언제나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는 虛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더 잘 볼 수가 있다. 또한 내 사유를 더 맑고 이성적으로 할 수 있다.
 나는 나에게 화를 낸 그 사람에게 사죄할 것이다. 그는 기뻐할 것이고 나 역시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할 수 있어 이득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실리주의 외교는 아니다. 또한 사고의 정지도 아니다. 그 사람을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고 나 자신의 자아를 고정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이것이 나비로도 장주로도 될 수 있는 物化의 길이고 大覺이라는 새로운 인식으로의 길이다.

by 짙푸른 | 2008/06/01 23:09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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