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Manus 손에게


Quid sunt plagae istae in medio                                                                    What are these wounds in the midst

manuum tuarum?                                                                                        of your hands?

—Zechariah 13:6                                                                                                                            —Zechariah 13:6

Salve Jesu, pastor bone,                                                                             Hail Jesus, Good Shepherd,

Fatigatus in agone,                                                                                     weary with striving,

Qui per lignum es distractus                                                                        torn in pieces on the wood

Et ad lignum es compactus                                                                         and fastened to the wood

Expansis sanctis manibus.                                                                         by your outstretched holy hands.

Manus sanctae, vos amplector                                                                    Holy hands, I grasp you

Et gemendo condelector,                                                                            and in groaning I delight;

Grates ago plagis tantis,                                                                             I give thanks for these severe blows,

Clavis duris, guttis sanctis,                                                                         for the hard nails and holy drops of blood

Dans lacrimas cum osculis.                                                                       with tears and kisses.

In cruore tuo lotum                                                                                     Washed in your blood

Me commendo tibi totum,                                                                           I entrust myself completely to you;

Tuae sanctae manus istae                                                                         may your holy hands

Me defendant, Jesu Christe,                                                                       defend me, Jesus Christ,

Extremis in periculis.                                                                                 in my final peril.

[Repeat: Quid sunt plagae istae]                                                                [Repeat: What are these wounds]

by 짙푸른 | 2010/12/31 21:21 | 트랙백 | 덧글(2)

明罪光線

淸明한 날은 짜증이 난다.
흐리거나 궂으면 오히려 안심.
맑은 날 햇살에 쬐이며 걸으면, 그것이 나의 죄를 드러내어 비추는 듯 하다. 명죄광선(明罪光線)이다.
견딜 수 없는 聖光을 뒤집어쓴채 족쇄를 끌듯이 걷는다.

by 짙푸른 | 2009/06/30 14:51 | 트랙백 | 덧글(0)

번간지쟁(繁簡之爭)

중국의 간자체와 대만의 번(정)자체 간의 논쟁이 뜨겁다 한다. 나는 중국어도 간자체도 모르므로 어느 쪽이 한자권에 유익한지는 잘 모르지만, 요즈음 確知하게 되는건 내가 어느 쪽이 유익하다 판한들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대만-중국史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史的상식으로도 13억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따라가기보다는 그 逆이 그럴싸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상식이라 하면 번간의 우열보다 정치/경제/역사적인 힘이 판을 좌우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상식. 결국 識者가 옳다고 부르짖음도 격풍을 미동시키는 바람 한 줄기일 따름이고, 하물며 식자와는 먼 나의 소견이야 오죽하랴.
한글과 한국어의 동일시, 그에 따른 국어의 비혼혈성 崇敬 등 한국어에 불만은 많지만, 결국 내가 대통령도 장관도 아니기에, 나는 사고를 당위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하려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내 흉벽胸壁에 메아리치는 블로그 私錄뿐이지만, 그래도, 삶이 생각하기에 합당하게만 흘러가면 반성 자체가 무슨 쓸모일까? 역설적으로 부조리와 사유는 공존으로서 相關하고 있는게 아니려나.

여담으로, 한글의 엄존과 한자의 무용을 관련짓음은 개인적으로 불가해하다. 한글표기는 일리가 있어도 한자 자체를 부정함은, 표음과 표의가 공존하는 언어에서 一翼을 꺾는 길로 나에게 비친다. 나타냄을 위해 뜻이 사라질 필요가 있는걸까?

by 짙푸른 | 2009/06/27 22:08 | 트랙백 | 덧글(0)

한인2세

근래 이따금 보도되는, 한인2세의 성공기를 조금 염려한다. 국민은 피가 아니라 법일 터. '無韓血의 한인'이 점증漸增하는 이 세기에 하인즈 워드에 보내는 찬사가 不知中 일부 국민을 따돌리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아직 해외에서 한인의 힘이 미약하던 시절, 저들의 자녀를 立身시킨 그 노고를 다만 알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외국인의 외국에서의 일화려니.

by 짙푸른 | 2009/06/26 21:19 | 트랙백 | 덧글(0)

이룸없는 꿈

今夢에도 잡다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거두절미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남겨두고 있는데 아침에 소파에서 눈을 뜨고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 이룸이 없었고, 그런 내가 남은 한달간 무엇을 이루랴 섬뜩하게 깨달았는데, 目前景(거실)이 어찌나 또렷하게 보이는지 마치 禪覺인가 싶었다.
일어나니 열두시였다. 죽고싶다.

by 짙푸른 | 2009/06/25 12:26 | 夢記 | 트랙백 | 덧글(0)

국어 로마字 記法에 대한 단상

1. 국어를 롬記할시 難題 중 하나가 ㅕ의 표기일 듯 한데 ㅓ(eo)라는 이미 난해하고 추상적인 記法에 y까지 붙여 yeo를 만드니 국어에 不熟하면 그 표기에 대응하는 모음을 떠올리기 어려움이 사실이다. 곤란하게도 yeo는 꽤 쓸일이 많은듯하다(Pyeongyang, annyeong, Gyeonggido 등). 예시처럼 -ㅇ(-ng)이 붙으면 그것은 이미 한 음절로 보기 어려울 경.
오로지 영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yo나 yu로 씀도 凡策의 하나. 허나 알다시피 ㅛ와 ㅠ와의 차별화가 불가하고 오독 확률이 높으니 차선일 뿐이다. 그러나 양자택일하라면 ㅠ보다는 ㅛ가 ㅕ에 가까운듯 하니 yo가 나을려나.

2. 또 'ㅡ'의 'eu' 표기도 때로 불편하다. 이 'eu'라는 字가 불어로는 peu(쁘), bleu(블르) feu(프) 등 'ㅡ'발음에 자주 近 하나 영어에서는 거의 안 쓰인다. 물론 英記가 아닌 롬記지마는 영어권에 居하는 자들에겐 불편함이 사실이다. 영어의 복합자음(이라고 하나?)이 국어에서는 字間에 'ㅡ'를 삽입하는 데에서(snake-스네이크, blue-블루) 난 발상인데, 역으로 'ㅡ'가 낀 국어字를 복합자음화하면 어떨까. 말하자면,

스님 -> seunim (x) snim (o)
글이 -> geuri (x) gri (o)
듯이 -> deusi (x) dsi (o)
들것 -> deulgeot (x) dlgeot (x)

물론 무결한 방안은 아니다. dlgeot처럼 자음 세 개가 병치되면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또한, sn나 gr는 괜찮지만 ds나 dl처럼 영어에서 복합자음으로 쓰이지 않는 자음병치도 발음하기 어려울 수 있다.

혹시나 해서 첨언하지만, 필자에게는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무하다.

by 짙푸른 | 2009/06/23 23:35 | 트랙백 | 덧글(0)

이름을 상형문자化해보자


우연히 佛文웹에서 재미있는 사이트를 발견.
기입한 이름을 발음대로 상형문자화해준다. (당연히 번역은 아니다)
위는 짙푸른(JITPRUN)을 입력한 결과.

by 짙푸른 | 2009/06/22 10:57 | 트랙백 | 덧글(1)

泣夢

우는 꿈을 꾸었다. 꿈을 詳說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覺中에는 잘 울 수 없다. 이는 물론 눈물을 흘림직한 까닭이 없어서이다. 虛淚를 삼킴이 장하도다.
꿈에서는 종종 각중에서는 스스로가 不許할 일를 하곤 한다. 각중 울었다면 自蔑했으리라.
스스로가 싫다.

by 짙푸른 | 2009/06/13 13:46 | 夢記 | 트랙백 | 덧글(0)

韓人의 背後擊

대학匿名게시판에서 '한국인'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저의 고등학교 한인 동창들은 모두 저의 등을 찔렀다며(stab in the back) 嫌韓感을 表하는者가 있었다.
한인에 대한 미국인의 인상은 말하자면 강한 相結性인저 '깨지길 바라는 연인錄'이라는 話頭에 '한국인과 PSP'라는 弄答이 달린 적도 있다.
背擊性이라함은 그러한 相集相結과도 無關치 않으려나.

by 짙푸른 | 2009/06/12 18:21 | 匿名板選錄 | 트랙백 | 덧글(0)

直感

내 직감으로는, 우리가 자신의 직감을 덜 믿으면 세상의 무한 다툼이 激減할 것 같다.

by 짙푸른 | 2009/06/09 12:54 | 트랙백 | 덧글(0)

음대생의 고로

내 대학에는 음대가 있는데 익명게시판에 종종 올라오는 음대생들의 단문이 흥미롭다.

"Sometimes when I practice unproductivly I think about how my goal in life is to make a chunk of wood sound decent
Then I proceed feeling very stupid and oddly satisfyed"
"연습이 부진할 때 이따금 나는 내 인생의 목적이 나무 한 토막에서 적당한 소리가 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매우 바보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만족스럽다고 느끼면서 연습을 계속한다"

"Sometimes I think about squeezing glasses in my hands till they break, so that I won't have to play anymore. 
-string player in the con."
"가끔 안경이 조각날 때까지 움켜쥐어 더이상 연주를 안 해도 되게 되는 일을 상상하곤 한다.
-음대의 현악가"

by 짙푸른 | 2009/06/08 02:00 | 匿名板選錄 | 트랙백 | 덧글(2)

東亞漢字文化圈

이즈음 한자를 외국어視하려듦이 不可解하다고 느낀다.
非한자어를 순우리말이라 칭한다면 한자어는 不純우리말이게 되는가. (생각해보니 순우리말 자체도 '불순'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문화의 국경이란 旣在했던 것인가. 혼합이 위대한 문명을 出産한 역사를 종종 읽는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는 스스로의 상징성을 格上하기 위해 자국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경우에는 중국(과거의 문화대국)과는 그 차별성을 강조하고, 일본(지금의 문화대국)과는 그 元祖性을 강조하고, 월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서구문명'의 영향력은 각 국가가 저들의 기원을 헬라-라틴문명에서 共히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文化圈의 공유유산인 한자는 이와共히 생각될 수 있는가.

by 짙푸른 | 2009/06/06 18:35 | 트랙백 | 덧글(2)

에야크의 宇宙


"가장 최근에 사라진 언어는 알래스카에서 쓰이는 '에야크(Eyak)'라는 언어로, 지난해 이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에야크語 최후의 독백을 마음에 그려본다. 바람. 눈. 태양. 사람. 친구. 사랑. 만물의 의미를 품은 하나의 우주가 이제는 단지 무의미한 지껄임. 내가 發散하는 의미는 共鳴치 않고 허공에 부딪치매 氣道를 타고 再歸한다. 깨닫는 것은, 한 마디의 독백일지라도 언제나 누군가에게의 부름이었음을.

에야크의 마지막 한마디는 우리 모두의 외로움과 같기에, 그 절대적인 고독을 나는 거듭 눈에 그린다.

by 짙푸른 | 2009/05/31 11:37 | 트랙백 | 덧글(0)

老衰

근래 눈이 침침하여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그림이나 글이 약간 흐릿하게 보인다.
늙어 衰함은 예컨데 외국인에게 잘 모르는 언어로 수업받기와 비근한 경험이 아닌가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불선명한 만화경같이 자신을 旋回하는 世人들이 자신에게 동정자然하려듦이 어쭙잖고도 슬프리라.

by 짙푸른 | 2009/05/26 22:31 | 트랙백 | 덧글(0)

2009/05/25 - 나의 첫 대학 수강표 (예정)

2009 秋期
Approaches to Western Art
서양美術史學접근론
Chinese Thought & Religion
중국의 사상과 종교
PHIL 216 - Modern Philosophy 
근대서양철학사
 

by 짙푸른 | 2009/05/25 15:26 | 留學記 | 트랙백 | 덧글(0)

8/3

나는 내 자신을 너무 믿는 것 같다.
그러면 성장이 불가능하다.

by 짙푸른 | 2008/08/03 20:49 | 트랙백 | 덧글(0)

8월 1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환영해주지도 않는 우리끼리의 기념일이지만 그래도 매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날이다.

by 짙푸른 | 2008/08/01 20:50 | 트랙백 | 덧글(0)

고교인생

고교인생

 나의 고교인생이 어느정도 끝났다. 나는 패배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을 매듭지어갈 뿐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신만이 알리라. 그런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나는 불만족스러운 성과를 보여주었고 어떤 결과에도 불평할 수 없다. 설령 3년 전과 같이 요행으로, 승리의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에게 패배한 것은 차이가 없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완패다. 그 결과의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이제와서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그 정도의 그릇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3년동안 진화했다. 천천히. 사회에 적합한 일꾼으로.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패인은 다음과 같다.

 1. 게으른 것
 2. 밀지 않은 것(자신의 게으름을)
 3. 늦은 것
 4. 미룬 것
 5. 마음 속 어딘가에서 자신은 고결하다고 생각한 것
 6. 너무 많이 후회한 것
 7. 너무 적게 반성한 것
 8. 가식과 위선

 아직도 나는 이러한 죄의 씨앗을 품고 있다.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언제일까.
 밀어야 한다. 순간순간 나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마치 팽이와 같아서 흔들릴 때 채찍으로 갈기지 않으면 곧 멈추어 버린다. 그러나 흔들리는 순간마다 적절히 쳐 주면 곧 마치 머리 위에 고요히 서 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팽이가 된다. 나는 나태가 덮쳐올 때마다 그 나태를 밀어 치우지 않았고 결국에는 몇번이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나의 수련은 점진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패배이다.
 오늘 조금 좋은 일이 있었다. 나는 순간 기뻐질려고 했으나 곧 스스로를 차게 식혔다. 기쁨은 슬픔의 씨앗이다. 새옹의 지혜를 상시에 기억하자. 나는 단지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며 밀어 나갈 뿐이다.

 

나는 잘 지내

 
 'How are you?'에 대한 답은 언제나, 'I'm fine, thank you.'가 되어야 한다. 상대는 나의 고민이나 아픔 같은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한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덧없는 애정호소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환부를 자극할 뿐이다. 그러나, 'I'm fine'은 단순한 인사치례가 아니고, 그것은 나의 굳건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진솔한 평상심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불행하다. 이것은 유아의 사고방식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성장한다는 것은 아픔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닌, 아픔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잘 지낸다.'

by 짙푸른 | 2008/07/01 18:21 | 트랙백 | 덧글(0)

운다는 것

 아아... 울고 싶다. 정말로 누구든지 상관없으니 위로받고 싶다. 밀밭의 허수아비처럼 지지대 없이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울어선 안 된다. 이것은 더러운 눈물이다. 마치 아이의 울음처럼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투정부리는 눈물이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느낄 때 종종 혼자서 울어 보았다. 남는 건 허무였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은 울어선 안 된다. 운다는 것은 지고한 행위이다. 그것은 종착점이다. 지금은 그저 의미 없는 곡에 불과하다.
 나는 종종 상상한다. 성공을 거둔 한 남자. 자아를 실현하고 세계를 위해 몸을 내던지며 뜨거운 삶을 살아간 그. 그의 삶에는 온갖 극적이고 감동적인 궤적들이 새겨져 있다. 좌절과 환희와 두려움과 우정과 이별과 그 모든 것이... 그 날 밤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느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귀가한다. 모든 것이 미음(微音)에 파묻혀져 있는 보랏빛 밤. 차창 밖으로 그는 흘러가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소리없이 차는 고속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집에 도착하자 두 천사같은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다. TV를 끄고 그는 지친 몸을 자리에 앉힌다. 아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늙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젊을 때와 다름없이 비치는 그의 반려자. 그를 이해하는 그의 영원한 동반자. 그가 사랑한 한 강인한 영혼. 둘이서 같이 간 길, 같이 겪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들... 아내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다. 남자는 짙은 미광이 은은히 감싸는 한밤중의 방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운다. 조용히... 지고하게... 몸을 비틀지도 않고, 크게 울부짖지도 않고, 다만 운다. 혼자서... 그것은 가장 고귀한 진주처럼 방울지는 눈물이다. 이유는 없다. 다만 운다. 마치 울면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울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겁하다. 민폐에 불과하다. 적어도 지금은.

by 짙푸른 | 2008/06/29 21:10 | 트랙백 | 덧글(0)

책을 선정하는 문제에 관하여



<ひとり上手> - 中島みゆき
 

 나는 어떤 주제에 몰입할 때마다 읽을 책을 선정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예를들어 최근에는 춘추전국에 관한 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 전체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많아도 고대사만 특별히 다룬 책은 별로 없었다. 결국 나는 어떤 책을 읽을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고심해야했는데 모든 책이 (나의 현재의 관심사에 비추어 볼 때)각자만의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책은 집필연도가 너무 오래전이라서 안되고, 어느 책은 고대사에 할애하는 부분이 너무 적어서 안되고... 마치 편집증처럼 나는 나의 목적에 부합하는 한 권의 책을 찾아 헤맸다. 어느 때에는 나의 이러한 집착이 성공적이기도 하지만 어느 때에는 실패한다. 
 나의 이러한 집착에 나는 내가 품고 있는 미신 비슷한 지식관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된다. 내가 나의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는 책을 갈구하는 이유는 내가 마음 어딘가에서 그 책을 소유하는 것을 나의 지식이 구체화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앎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 실제적인 책이 되는 것이다. 내 두뇌는 마치 책을 담아두는 창고처럼 이미지화된다.
 이런 미신은 나의 다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벗어나야 한다. 작가들은 책을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내 목적에 부합하는 책이 언제나 존재할 수는 없다. 나는 나의 지식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야 한다. 나는 단 한 권의 책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종합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일수 밖에 없다. 좋고 나쁜 책의 가림은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지나친 편식은 독이 된다.

by 짙푸른 | 2008/06/28 18:02 | 트랙백 | 덧글(0)

치과

 1. 최근 치과에 다닌다. 죽을 맛이다. 치료과정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항상 치료대에 누울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나는 여기에 쉬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벌을 받고 있다. 양치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은 벌. 단 것을 과식한 벌. 의사의 말을 미리미리 듣지 않은 것. 그로 인해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있다. 시간 낭비. 신체의 고통. 무엇보다 돈. 아, 돈!
 나의 채찍질이 더 혹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편하게 앉아 금니를 끼우지만 그것은 몽땅 나의 부모에게 청구된다. 나의 바보같음으로 인해 이런 타격을 입히게 되다니. 눈물이라도 쏟고 싶다.
 아직 치료는 한참 남았다. 더욱 더 스스로를 비난하기를 원한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그러나 사실 나는 어젯밤 양치를 하지 않았다. 오, 주여... (웃으면 안 되는데...)
 2. 나는 애정결핍이다.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게 애정을 나누어주면 나는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또 두려워한다. 그것을 잃을까. 그래서 적절히 거리를 둔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 때문에 또다른 결핍이 생긴다. 결국 나는 애정문제에 있어서 결핍과 집착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동년배의 여성을 친구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것은 욕정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부적으로 금해버리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이 나온다. 친구라고 함은 가깝다는 것인데, 스스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이미 나에게 노나준 애정 한 조각에 나는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정으로서 받아들인다면 좋을텐데.
 누구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그러한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말은 쉽지. 나는 오늘도 새까맣고 끈적거리는 리비도의 바다에서 무기력하게 부유하고 있다.

by 짙푸른 | 2008/06/27 21:59 | 트랙백 | 덧글(4)

개미지옥

 내가 어렸을 때 개미지옥 아니면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있었다. 일종의 놀이인데 일단 세 명 정도가 모여야 가능하다. 몇 놈은 모래밭에 앉아서 고사래손으로 열심히 구덩이를 판다. 몇 놈은 식수대로 가서 열심히 물을 나른다. 모래에 흡수되기 때문에 빨리빨리 날라야 한다. 계속 반복하면 웅덩이가 형성된다. 묘미가 여기에 있는데 질퍽한 모래로 여러 지형을 만들 수 있다. 호수도 만들 수 있고 계곡도 만들 수 있고 미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개미 몇 마리를 빠트린다. 그럼 그 놈들이 열심히 발버둥치면서 헤엄(?)을 친다.
 딱히 개미를 괴롭히고자 하는 새디스트적인 욕망이 있는 건 아니고 단지 소세계를 창조하는 재미가 있었을 따름이다. 개미는 그 나라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거주민이었다. 육상세계가 수중세계로 전환하는 그 기묘함. 뭍과 물을 가른 우리는 완성된 세계에 감동해 탄식했다. '보기에 좋았노라.'
 생명경시풍조를 낳는 잔혹한 유희라고 생각될 여지도 있지만 일면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개미지옥 놀이는 근본적으로 창조의 놀이다. 남아의 놀이문화에는 창조성이 너무 부족하다. 싸우고 부수고 이기는 놀이는 많지만 정교하게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고 복잡한 것을 창조하는 섬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인형의 집을 남아들에게서 앗아간 부모들 탓이다. 어떻게 보면 인형의 집보다 배로 낫다. 인형의 집은 말하자면 레토르트, 아이들이 새로 개발할 여백을 남겨놓지 않은 기성제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훨씬 더 스릴있고 어려운 게임이다.
 놀이가 전래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 발상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근래에 똑같은 짓을 하는 아동들을 난 보았다. 비가 그친 후 아파트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래밭에 수로를 파고 있었다. 내 때보다 스케일이 배로 거대했다. 부질없는 조물주 놀이에 열중하는 대여섯명의 아동. 개미를 띄웠는지는 모르겠다. 그정도 규모라면 개미도 뗏목이 필요할텐데.

by 짙푸른 | 2008/06/26 21:26 | 트랙백(1) | 덧글(2)

안명

 1. '20년 후에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이처럼 실없는 질문도 없는데 그것은 올바른 주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20년 후의 나에게 물어봐야지, 지금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종종 학생들에게 목표를 세우고 공부를 하라는 식의 격언을 서슴치 않는 교사나 학부모들이 있다. 이것은 겉보기에 좋아 보일지 몰라도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의 공부의 주된 목적은 그 목표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분될 수 없다. 이처럼 목표와 공부를 이분하는 것은 공부에서 성찰이라는 요소를 제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감내해야할 노동으로 전락시켜버린다.
 나의 역사는 지금에서 시작해 지금에서 완결된다. 순간순간 태어나고 죽어갈 뿐이다.
 2. 누구라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해결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성장의 일부이다. 세상에는 어떻게 힘을 쓰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그러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있다. 그런 고통까지 감싸안으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 역시 말할 수 없다.
 3. 미래는 항상 원하는 대로 결말나지는 않고, 과거를 뒤돌아보면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다. 
 상상한 바가 틀리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미래에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상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무섭기 때문이다.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피 엔딩도 없고, 짜여진 플롯도 없는, 무규칙하고 불특정한 운명이다.
 안명하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완성의 문제가 아니다. 미완성이 곧 완성이다. 안명하지 못하는 이러한 과거까지, 다 안명해야 한다.

by 짙푸른 | 2008/06/25 21:02 | 트랙백 | 덧글(0)

긍정적과 부정적

 토론에서 그 진행을 가장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마법의 구절 중 하나는 '~가 뭔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어휘를 생각없이 사용한다. 그리고 그런 두리뭉실한 언어 위에 사상누각처럼 지어진 논리구조에 만족한다. 이것은 또한 소통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물 중 하나로, 같은 단어를 서로 달리 이해하니 대화는 끊임없는 동어반복으로 전락한다.
 대화에 방해가 되는 이러한 모호한 단어 중 대표적인 것이 둘 있다. 긍정적과 부정적. 이 두 단어는 호불호를 보여주는 것 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굳이 이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모든 정보를 이 두 범주로 분류하고 만족해한다. 가령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취하는 결단은 긍정적이고 그것을 훼방놓는 적의 잔꾀는 부정적이다. 이러한 범주화는 우리가 더욱 자세히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을 방해한다. 왜냐면 이것은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분석의 영역을 유아의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유아는 사물을 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 뿐이다. 유아의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은 쉬우나 공허하다. 또한 작가의 지성을 모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정교히 설치해놓은 수많은 논리의 질곡을 건너뛴 채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로 이분시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긍정적과 부정적으로의 범주화는 어느 시점에서는 의미있는 방편일지도 모르나 그것 자체로는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by 짙푸른 | 2008/06/24 11:49 | 트랙백 | 덧글(0)

초등학생들의 축구

 오늘 아동 세 명이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보았다. 여자아이 한 명에 남자아이 둘.
 치마까지 곱게 차려 입은 소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왜 여아들은 스포츠를 하지 않을까? 초등학생까지는 남여의 체력이 엇비슷하다. 열심히 연습하면 축구에서도 소년들을 제칠 수 있는 것이다. 중학교 까지도 원한다면 농구나 축구 따위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소녀들은 거의 스포츠를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여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피구라던지.
 이렇게 문화의 차이와 집단의 양분이 운동장에서 처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소녀들은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를. 소년들은 축'구'와 농'구'를. 비경쟁적이고 협동적인 '놀이'를 하면서 소녀들은 소녀가 되고 전체주의적이고 호전적인 '구기'를 하면서 소년들은 소년이 된다. 어떠한 크로스오버도 단지 극소수의 괴짜로 취급될 뿐이다. 나는 스포츠를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축구는 정말로 싫어했다. 쓸쓸하게 골문 주변을 서성인 것이 몇 게임이던가...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골도 넣어본 적 없다. 슬픈 유년기다. 
 생각해보면 축구 같은 단체 스포츠는 그 내부적으로 어떤 약점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항상 약한 아이들은 짐짝으로 취급된다. 강한 아이들은 우상화된다. 모든 남자가 스포츠를 할 필요는 없다.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체육시간에 강제로 아이들을 잔디밭으로 농구장으로 몰아 넣지 말아라. 약한 아이에게는 그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섬세하고 평화적인 신체 놀이를 장려하면 된다. 반대로 모든 여자가 스포츠를 안 할 이유도 없다. 여아들에게도 그 땀 뻘뻘나는 잔디밭의 질주를 체험하고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탈 젠더인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갑자기 말을 걸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일단 매점에 들어갔다 나온 후 물어보자. 매점을 나오자 그 아이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깝다.

by 짙푸른 | 2008/06/23 20:46 | 트랙백 | 덧글(0)

하늘 까페

 아침에 일어나니 천둥이 치고 있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방을 나섰다. 글도 쓰면서 있다가 곧 9시가 되었다. 운동회는 가기 싫다. 몰래 빠져도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1층 체육관으로 가는 척 하고 몰래 4층으로 갔다. 4층에 카페가 있다 들었다. 에라, 여기나 들렀다 가자.
 카페에는 나밖에 없었다. 얼그레이 차를 시켰다. 향이 좀 강했지만 맛있었다. 무엇보다 뜨거운 물을 계속 채워주어서 좋았다. 알지 못하는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들었는데 참 좋았다. 창 밖의 경치가 꽤 좋았는데 구름 흘러가는 것하고 노래하고 잘 어울렸다. 커피와 홍차에 관한 잡지가 있었는데 좀 훑어보았다. 만화책도 있었다. 중학생 때 봤던 만화가 있어서 반가웠다. 쿠키도 샀다. 그렇게 11시 되기 조금 전 까지 2시간 동안 있었다.
 내려가자 운동 경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11시 10분이 되자 떠났다. 나는 남은 쿠키를 같은 반 애들에게 나눠주었다. 솔직히 그거 혼자서 다 먹으면 살찐다. 양보다 질이다.
 차 안에서 잤다. 광나루 역에서 혼자서 내렸다. 미술사 스터디 하러 갔다. 먼저 와 있는 분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스터디를 3시간 정도 하고 식사를 한 다음에 다시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데 부모와 어린애들이 있었다. 흑인 두 명이 다가오더니 한 명이 애들에게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High Five!" 여자아이가 자신의 손을 4배 정도 되는 큰 손바닥에 짝 부딪쳤다. "Good~" 나는 다음 역에서 내리는 척 하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부인이 임신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애들을 보니까 어제 캠프에서 식사하다 본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식사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 먹고 엄마와 같이 일어나자 나에게 손을 흔들고 가는 것이었다. 깜찍하다. 보통 아이들은 낯을 가리는데...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해가 비추고 있었다. 중앙선은 야외열차라서 좋다. 햇빛이 사람들의 머리 뒤로 비친다. 눈부시다. 나는 내 청춘은 이걸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짙푸른 | 2008/06/22 20:47 | 트랙백 | 덧글(0)

휴가에 대하여

 사람은 휴가라는 것을 너무 양적으로 생각한다. 무릇 휴가는 질적인 것이다. 한 달 동안 어디를 투어 다녀오니 펜션을 전세놓니 해도 단 몇 시간 만의 산책만도 못할 수 있다.
 사람은 휴가를 위해 살지 않는다. 휴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만약에 휴가를 위해 산다면 그것은 너무 슬플 것이다. 일 년 동안 단 스무 일 정도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말은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는 사치가 허용된 사람이나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다 해도 휴가의 양적인 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봄이 되면 꽃구경을 많이도 간다. 여자랑 못 가서 쓸쓸하다는 총각들도 있고, 일에 치여서 남들 다 가는 벚꽃놀이 못 가봤다고 한탄하는 직장인들도 보인다. 나는 꽃구경을 가본 적이 없다. 그냥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말이다. 그런데 벚꽃이 다 져갈 무렵, 버스를 타고 남산 쪽을 올라가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보니 푸르른 오월의 색채가 시야를 덮었다. 바람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실려 왔다. 나는 잠시 동안 그것을 보고 있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내가 내릴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나는 생각했다. 벚꽃놀이를 구태여 가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물론 가게 되면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거기에 집착해서 가겠다 못가겠다 하면 그것은 되려 배꼽이 배보다 큰, 고통이 만족보다 큰 줄다리기가 되는 것이다. 그 10분으로 충분했다. 휴가가 이틀이니 삼일이니 징징 울며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어느 해수욕장이 좋으니 어느 해외여행이 좋으니 구차하게 따지고 얽매이지 않아도 그 허름한 버스 좌석 위의 10분만으로 나는 심신이 정화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패스트 푸드처럼 모든 것을 압축해서, 한나절을 걸쳐서 볼 박물관을 한 시간 안에 바삐 몰아 본다거나, 소위 명소라는 곳들을 투어 버스로 빙 둘러서 등으로 관광을 한다거나, 이런 식의 구슬픈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보아야 한다는 압박감만을 낳을 것이다. 오히려, 적은 것으로 전체를 느끼라는 것이다. 홍순민이라는 궁궐 연구가는 이런 비유를 든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아예 흙더미를 산채같이 끌어모아서 산을 만들어버리고, 일본인들은 올망졸망 조그마하게 흙을 뭉쳐 놓고 이것은 산이요 하는데, 한국인들은 산의 자그마한 조각들을 가져다 놓고 거기에서 산을 느낀다." 얼마나 운치있고 자유로운 선조들의 풍류인가? 왜 휴가에 집착하여 또다른 고통을 낳고자 하는가? 기왕에 휴가를 즐기려면 집착을 버리는 것이 좋다.

by 짙푸른 | 2008/06/21 10:42 | 트랙백 | 덧글(0)

애니메이션

 한 4년만에 한국판 뉴타입을 사 본 것 같다. 내 인생 중 뉴타입이라는 잡지를 구매해 보고 만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오랜만에 무슨 애니가 뜨는지 확인이나 해 볼 겸 샀다. 애니라는 건 원래 신작 좇아서 보는 게 아니지. 신작 리스트를 보면 일정한 패턴에 맞춰 만든 작품이 대부분이지 뭔가 참신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화도 그렇지만 애니는 더욱 패턴을 좇을 수밖에 없다. 패턴을 깬다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은 의외로 보고 싶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작품을 '보고 싶다'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회의를 해 보는 게, 사실 나는 대부분 캐릭터 디자인만으로 만화나 애니를 볼 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 같다. 그 그림체가 끌리느냐 안 끌리느냐가 내가 1차적인 판단을 내리는 무의식적인 기준이 되는 것 같다. 마치 영화를 영화 배우 얼굴을 보고서 결정하는 것처럼. 사실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서 추천받아 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표지만 보고 내용을 어림짐작하는... 그래서 요즘에는 그러한 방법론을 배격하기 위해 무조건 1화를 읽어 보고 결정하는 식으로 만화를 고른다. 그런데 애니의 경우에도 그게 가능할지는.
 그리고 또 하나, 유명세 회피의 병. 이건 반쯤 의식하고 있었지만 일단 나는 어떤 작품이 유명하면 보기가 꺼려지는 것 같다. 어떤 작품은 사람들과 같이 유행 타면서 보는게 재미있기도 한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나는 뭐랄까, 자기가 스스로 발굴해 낸 작품을 더 즐기는 것 같다. 그것이 왠지 더 은밀하기 떄문이다. 작품와 나만의 은밀한 소통. 남들이 보는 것을 따라 본다는 것은 그러한 느낌이 없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요소는 실제로 크다. 자신이 혼자서 본다는 것과 남들과 같이 본다는 것은 작품 자체의 감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양극단 중 택일한다. 아무와도 그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본격적으로 유행 타고 리뷰같은 것을 써가면서 같이 보거나. 그런데 나를 감동시킨 대부분의 작품을 나는 혼자서 봤다.

by 짙푸른 | 2008/06/20 08:11 | 트랙백 | 덧글(0)

B급 인간

 근 3년, 아니 2년 나의 생활은 사회적 능력에서 보았을 때 C에서 B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던것 같다. 나는 B급 인간이다. 중간은 가는데 멍청해서 실수를 곧잘 한다. 가끔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그것은 허상. 자기만족. 가끔씩 번득이는 가능성. 그런데 그것은 B급이라면 누구나 있다. 사회는 A급을 요구로 한다. A급이 더 잘났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에 좀 더 필요한 부품이라는 말이다. A급은 늦잠 자지 않고 실수는 가끔밖에 하지 않고 일정에 철저하고 자잘한 고민을 한다. 완전한 타의에 의한 사고 외에는 절망이라는 것을 경험해 볼 일이 없는 부류다. 나는 A급이 되고자 하고 있다.
 사실 이미 늦었다. B급은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 대학은 B급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러한 것이 이미 도무지 상관이 없다. 그렇다. 나는 C에서 B로 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A로 갈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다른 어떠한 부차적인 팩트는 필요가 없다. 단지 A로 갈 뿐이다.
 교사는 나를 패배자로 보았다. 어떻게 힘을 내면 갱생이 가능할 정도인, 그런 부진한 자로. 그런데 그렇게 간단히 힘을 낼 수 있으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느냐고... 힘을 못 내니까 B급이 아니겠냐고... 그런데 사실은, 네 그렇습니다. 저는 패배자입니다. 근데 이거 아세요? 패배자도 앞으로 나아간답니다. 느리적거리며 기어서 나아간답니다. 그것은 게을러서인데 사실 게으르니까 패배자죠. 게으름을 이기기 위해서는 게으른 걸음이 언젠가 뜀박질이 되도록 계속 기어갈 수밖에 없어요. 네, 패배자도 나아갑니다. 패배자가 나아가는 것은, 그것은 사실, 뭐랄까, 빛나는 내일이라던지, 희망찬 미래라던지, 그런 미래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사실 현실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패배자는 존재할 이유조차 잃어버린다고 스스로 생각하거든요. 사실 골인을 하지 못해도 좋아요. 자동차 게임 하다 보면 리타이어라는 거 있죠? 8등으로 끝없이 외로운 길을 달리다 갑자기 타의에 의해 뚝 멈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너는 졌다! 하며 갑자기 선전포고되는 그 무력한 패배. 리타이어해도 좋아요. 아니 사실 리타이어 할겁니다. 아마 그렇게 보는게 옳겠죠. 뭐 골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만약이죠. 사람이란 항상 만약을 가정하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절망하게 되니까, 만약이라는 건 아예 생각을 안하는게 건강에 좋습니다. 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앞으로 갈겁니다. 울지 않으려고.

by 짙푸른 | 2008/06/19 23:50 | 트랙백 | 덧글(0)

최근 본 만화 1

<최강전설 쿠로사와>
<폭음 열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y 짙푸른 | 2008/06/18 23:12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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