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나뗄로. <다윗>. 1430-32년경. 청동. 높이 158.1cm. 피렌체 국립 미술관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정말 '섹시한' 몸이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도 자연스러운 골격. 소년다운 장난기 어린 표정에 거만함이 한껏 드러나 있는 자세. 전라에 부츠와 모자만 입고 있는 에로틱함. 또 이런 신체의 특징들을 한 눈에 나타내게 하는 구도.
서양미술, 특히 조각에 있어서 이러한 이상적인 육체미에 대한 동경은 고전주의의 부활이래 계속 이어져 내려왔던 것 같다. 주름도, 군살도, 흉터도 없는 영원한 젊음의 육체. 육체로서 이성을 표현하려는 초월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는 흔히 영육을 이분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적인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피조물들을 조각가들은 단지 '보기에 좋았노라' 하기 위해 빚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런 완벽한 육체는 이성의 표현이며 가장 정신적인 것이다. 이런 잘생긴 사람은 지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라면 모를까..
진중권 교수의 기사 에서는 이러한 칼로카가티아적인 윤리가 아직까지도 살아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사실이다. 지금 건강한 육체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강력하게 숭배되고 있으며 육체를 과시하는 것은 수치가 아닌 특권이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며 반박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항변이 새삼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관념속에서 육체적 미가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증한다.

우리는 챠도르를 입는 이슬람계 여성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에는 어느 정도 회의가 필요하다. 살인적인 다이어트와 화장, 성형의 암묵적인 강요에 떠밀리고 있는 신여성(혹은 남성)들은 정말 자유로운가? 이슬람 교도들의 챠도르는 단지 남성중심적인 금욕주의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육체미의 담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적인 열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체에 관한 우리의 서구적인 시각 역시 성찰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도 역시 신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주의 조각상에서 나타나는 육체미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신체의 미학이 조형적이고 외적인 미학이라면 동아시아의 신체미학은 사색적이고 내적인 미학에 가깝다. 신체가 어떻게 내적일 수 있는지, 신체를 영혼의 껍데기로 생각하는 기독교적 신체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을 것이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유불도의 세 전통은 신체를 정신에서 분리시켜 생각한 적이 없다. 내 몸의 기의 흐름이 곧 나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이성을 순수한 정신의 사변적 작용으로 생각하는 서양적 영육관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 유불도의 진리는 단순히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신체적으로 각인되어야 하므로 신체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그 신체의 수련은 저러한 외적인 미를 가꾸기 위한 김나시움의 젊은이들의 육체 단련과는 달리, 나의 몸을 제대로 알고 다스리는 것이다. 선사(禪師)의 수련은 그가 공을 차거나 역기를 들지 않는다고 해서 순전히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수련 자체가 끊임없는 육체의 내적 단련이다. 역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동아시아적 신체 미학은 외부적으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서양미술, 특히 조각에 있어서 이러한 이상적인 육체미에 대한 동경은 고전주의의 부활이래 계속 이어져 내려왔던 것 같다. 주름도, 군살도, 흉터도 없는 영원한 젊음의 육체. 육체로서 이성을 표현하려는 초월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는 흔히 영육을 이분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적인 개념에 가깝다. 이러한 피조물들을 조각가들은 단지 '보기에 좋았노라' 하기 위해 빚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런 완벽한 육체는 이성의 표현이며 가장 정신적인 것이다. 이런 잘생긴 사람은 지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라면 모를까..
진중권 교수의 기사 에서는 이러한 칼로카가티아적인 윤리가 아직까지도 살아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사실이다. 지금 건강한 육체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강력하게 숭배되고 있으며 육체를 과시하는 것은 수치가 아닌 특권이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며 반박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항변이 새삼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관념속에서 육체적 미가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반증한다.

우리는 챠도르를 입는 이슬람계 여성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에는 어느 정도 회의가 필요하다. 살인적인 다이어트와 화장, 성형의 암묵적인 강요에 떠밀리고 있는 신여성(혹은 남성)들은 정말 자유로운가? 이슬람 교도들의 챠도르는 단지 남성중심적인 금욕주의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육체미의 담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적인 열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체에 관한 우리의 서구적인 시각 역시 성찰이 필요하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도 역시 신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주의 조각상에서 나타나는 육체미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신체의 미학이 조형적이고 외적인 미학이라면 동아시아의 신체미학은 사색적이고 내적인 미학에 가깝다. 신체가 어떻게 내적일 수 있는지, 신체를 영혼의 껍데기로 생각하는 기독교적 신체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을 것이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유불도의 세 전통은 신체를 정신에서 분리시켜 생각한 적이 없다. 내 몸의 기의 흐름이 곧 나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이성을 순수한 정신의 사변적 작용으로 생각하는 서양적 영육관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 유불도의 진리는 단순히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신체적으로 각인되어야 하므로 신체에 대한 내면적인 성찰이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그 신체의 수련은 저러한 외적인 미를 가꾸기 위한 김나시움의 젊은이들의 육체 단련과는 달리, 나의 몸을 제대로 알고 다스리는 것이다. 선사(禪師)의 수련은 그가 공을 차거나 역기를 들지 않는다고 해서 순전히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수련 자체가 끊임없는 육체의 내적 단련이다. 역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동아시아적 신체 미학은 외부적으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말년의 김홍도. <염불서승도>
고전주의 조각가들이 영원한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소년들을 그렸다면 동아시아의 화가들은 노인을 그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쭈그러들어 가는 그들의 육체를 그린 이유는 그 안에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선적인 미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온한 육체인가? 타오르는 불은 곧 꺼지지만 고요한 호수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자신의 신체에 대한 사랑이 요구되었을까. 동아시아의 노인들이 장수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다.
고전주의 조각가들이 영원한 젊음과 패기가 넘치는 소년들을 그렸다면 동아시아의 화가들은 노인을 그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쭈그러들어 가는 그들의 육체를 그린 이유는 그 안에서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선적인 미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온한 육체인가? 타오르는 불은 곧 꺼지지만 고요한 호수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자신의 신체에 대한 사랑이 요구되었을까. 동아시아의 노인들이 장수하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다.




덧글
카리스턱 2008/08/10 02:43 # 삭제 답글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일부를 제 포스팅에 퍼갔습니다트랙백도 함께 걸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