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지옥

 내가 어렸을 때 개미지옥 아니면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있었다. 일종의 놀이인데 일단 세 명 정도가 모여야 가능하다. 몇 놈은 모래밭에 앉아서 고사래손으로 열심히 구덩이를 판다. 몇 놈은 식수대로 가서 열심히 물을 나른다. 모래에 흡수되기 때문에 빨리빨리 날라야 한다. 계속 반복하면 웅덩이가 형성된다. 묘미가 여기에 있는데 질퍽한 모래로 여러 지형을 만들 수 있다. 호수도 만들 수 있고 계곡도 만들 수 있고 미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개미 몇 마리를 빠트린다. 그럼 그 놈들이 열심히 발버둥치면서 헤엄(?)을 친다.
 딱히 개미를 괴롭히고자 하는 새디스트적인 욕망이 있는 건 아니고 단지 소세계를 창조하는 재미가 있었을 따름이다. 개미는 그 나라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거주민이었다. 육상세계가 수중세계로 전환하는 그 기묘함. 뭍과 물을 가른 우리는 완성된 세계에 감동해 탄식했다. '보기에 좋았노라.'
 생명경시풍조를 낳는 잔혹한 유희라고 생각될 여지도 있지만 일면에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개미지옥 놀이는 근본적으로 창조의 놀이다. 남아의 놀이문화에는 창조성이 너무 부족하다. 싸우고 부수고 이기는 놀이는 많지만 정교하게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고 복잡한 것을 창조하는 섬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인형의 집을 남아들에게서 앗아간 부모들 탓이다. 어떻게 보면 인형의 집보다 배로 낫다. 인형의 집은 말하자면 레토르트, 아이들이 새로 개발할 여백을 남겨놓지 않은 기성제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훨씬 더 스릴있고 어려운 게임이다.
 놀이가 전래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 발상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근래에 똑같은 짓을 하는 아동들을 난 보았다. 비가 그친 후 아파트 9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래밭에 수로를 파고 있었다. 내 때보다 스케일이 배로 거대했다. 부질없는 조물주 놀이에 열중하는 대여섯명의 아동. 개미를 띄웠는지는 모르겠다. 그정도 규모라면 개미도 뗏목이 필요할텐데.

by 짙푸른 | 2008/06/26 21:26 | 트랙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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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Kind of Blue.. at 2008/06/28 20:49

제목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짙푸른" 님의 개미지옥으로부터 트랙백 이 글을 읽다 보니 남아의 "싸우고 부수고 이기는 놀이"를 변호한 움베르토 에코의 명문이 생각나서 소개해 봅니다. [본문 보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스테파노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구나. 곧 시내의 상점들은 해마다 벌어지는 풍요로운 연극을 계획할 준비로 흥분해 있는 아버지들로 붐비겠구나. 아버지들은 위선적인 기쁨을 드러내며, 자식들에게 선......more

Commented by shaind at 2008/06/27 22:41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생각나는군요. 시간이 나는 대로 트랙백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짙푸른 at 2008/06/28 09:18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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